[CLASSI그널] 안현정의 컬쳐포커스 전통이 미래다! 서예와 현대미술의 낯선 공존
안현정 기자 | media@beautynury.com 플러스아이콘
입력 2023-02-22 06:00 수정 2023-02-22 06:00


“낯선 만남 : ~ @ # /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

“~ @ # /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라는 부제를 거꾸로 “서예를 당신은 어떻게 읽나요?”라는 문제의식으로 전환해 생각하면 간단하다. 전자에 동의하는 신세대이고 후자에 동의하는 구세대일까. 이러한 문제인식이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이하 서예관)의 ‘낯선 만남’이라는 기획전 안에 녹아들어 있다. ‘~’을 기계와 음악으로 해석한 [이신영x민찬욱], [정준식x이다희], ‘@’은 대형 설치 작품과 퍼포먼스로 해석한 [채송화x고숙], [송이슬x조지], ‘#’를 신구문화의 이항대립으로 보여준 [이윤정x김원진], [이완x인세인 박], ‘/’을 만남과 파생의 의미로 조합한 [윤정연x박현지],[이광호x선우훈], 이들의 콜라보는 ‘서예와 현대미술과의 만남’을 뛰어넘어 ‘전통의 보편가치를 개성 가치로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를 보여준 전시이다. 

현대예술, 전통 예술혼에게 길을 묻다.

현대예술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 이 평범하면서도 난해한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다. 우리는 장르의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현대예술 앞에서 자주 당혹스러움을 경험한다. 하지만 ‘전위(前衛)’라는 이름으로 어떤 행위가 펼쳐진다 해도, 그것이 시각예술인지 공연예술인지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제 부질없어 보인다. 어떤 예술인지 구분할 필요조차 없는 통섭(統攝, consilience)과 융합(融合, convergence)의 시대 속에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왜 많은 사람들은 현대예술을 위해 자본과 시간을 낭비하는가? 왜 예술작품이나 미적 대상들은 우리에게 중요하며, 우리는 왜 미적 경험을 갖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남긴 최대 수혜자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대예술이 남긴 ‘나’라는 대상을 스스로 비판하고 새로이 우일신(又日新)하여 ‘신예술(New Art)’을 모색해야 한다. 여기서 강조돼야 할 것이 ‘전통 예술혼의 현대화’이다. 과거에 형성된 문화예술의 힘이 현재까지 이어져 새로운 ‘창조의 원동력’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낸다는 뜻의 고사성어 ‘법고창신(法古創新)’과 같은 맥락이다. 이 개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작가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에게서 유래된 말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통(變通)할 줄을 알고 새로이 창작하면서도 법을 지킬 줄 안다면 과거보다 앞서는 새로운 전통을 세울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술의전당 서예관 낯선만남 콜라보 전시

MZ세대의 전통 읽기, 소재주의를 극복한 새로움 

아는 것이 정말 힘인가? 한자를 해독하는 것이 권력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새로운 세대들은 문자에 담긴 의미를 직관으로 이해한다. 원인은 간단하다. 전근대 시대엔 시대인식(episteme)이 권위 있는 학자들의 언어로 보편화됐다면, 오늘의 시대엔 기술의 변화가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개성화의 변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들의 의사소통 방식은 인스타그램의 약호들로 축소되고, 빠른 세대교체와 교육방식의 변화는 결과가 아닌 카멜레온처럼 빠른 옷차림을 강조한다. 말 그대로 예술의 역할론에 변주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통의 현대화에는 이처럼 소재주의의 극복이 필요하다. 올해 100주년인 조선미술전람회 서·사군자부는 이미 1930년대 서예를 봉건시대의 유물로 치부하고 ‘미술의 영역’에서 제외 시켰다. 전통양식의 전승과 명맥을 유지 시키기 위해 존속시켰던 문인(文人)미감과 서(書)의 위계질서를 탈각시킴으로써 회화를 문자 우위에 세우게 유도한 것이다. 이는 오늘에까지 ‘서예’가 미술에 포함되는 것을 경계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전통을 지우고 새로움으로 나아간다는 ‘모던 아방가르드’의 신화는 최근 전통 속에서 새로움을 찾는 ‘뉴트로 컨텐츠’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현대작가들이 선택한 개성화 과정 속에서 달항아리와 민화의 브랜딩이 새로운 문화마케팅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안에 본질을 잃은 소재주의라는 비판이 팽배하다. 그럼에도 전통의 재발견은 다양한 문제점과 출혈을 떠안더라도 끊임없이 이어가야 할 도전적 가치이다. 




전통과 현대의 접점, 서예를 뉴트로 하라!  

그래피티, 팝아트와 엮은 서예, 전통 세대와 현세대의 접점을 던지는 문제적 전시들, 예술의전당 서예관의 전시들은 “어떻게 개성화를 이룰 것인가. 현대미술과 어디까지 공존할 것인가.”라는 역할론과 만나게 되었다. 서예관의 역할은 결국 문제적 전시를 센세이션하게 던지면서 ‘서예의 소통’과 현대미술 속 위치정하기에 하나의 접점을 마련해야 하는 숙명을 띈 것이다. 이를 위해 문자문화의 보편성을 전제로 한 ‘서예의 전통’을 잇는 토대전시와 ‘서예 실험을 위한 장(場)’을 위한 기획전시 운용이 지속돼야 한다. 서예의 활성화에 관한 화두는 “동시대 작가들이 우리 서예사에 왜 무관심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심사위원 그룹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사숙(私淑) 중심의 공모전 시대는 지났다. 채본(債本)에 따라 고대로 따라 하는 임모(臨模) 중심의 서예는 이제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에겐 관심 밖 이야기가 된 것이다. “작품을 봐줄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기성 서예계의 탄식은 서예가 미술의 또 다른 얼굴이자, 다양한 시대인식을 머금은 상징기호라는 사실이 보편화 돼야 만이 사그라들 것이다. 낯섦을 공존의 가치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통해 전통의 새로운 영토를 구축한다는 뜻이다.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열어 전통과 현대의 다리를 잇는 교두보, 이것이 지금 서예관의 창조적 전시들이 끌어안은 과제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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